2022년 1월, 한 사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독서모임에 나갔다.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. 우산도 없이 쫄딱 젖은 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,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. "그래도 못할 거 없지." 여덟 시간 동안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집에 돌아오는 길, 그는 다짐했다. "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나가자."
2년 뒤, 2024년 12월. 그는 5일 동안 눈을 감고 누워만 있었다고 썼다. 무슨 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. 다만 그 시간이 끝난 뒤 이렇게 적었다. "우리가 눈을 볼 수 있음으로써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어. 바보같이 보인다는 이유로, 쑥스럽다는 이유로 미뤘던 것들이 있잖아. 그런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."
두 순간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상한 게 보인다. 완전히 다른 길로 갔는데 결론이 똑같다. "미루지 말고 지금 하라." 2022년에는 무언가를 얻어서 이 결론에 닿았다. 새로운 경험, 두려움을 이긴 성공. 2024년에는 무언가를 잃어서 닿았다. 본다는 당연한 감각을 5일간 빼앗긴 뒤에야, 그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.
같은 결론에 두 번 도달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답이다. 각성은 한 번 얻으면 평생 가는 상태가 아니다. 그것은 소모품이다. 쓰면 없어지고, 없어지면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. 확장으로 얻은 것이든 박탈로 얻은 것이든 둘 다 휘발된다. 2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연료를 태워야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.
흥미로운 건 두 각성이 만든 다음 행동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다. 확장에서 온 각성은 가속으로 이어졌다 — "계속 나가자"는 앞으로 더 밀고 나가라는 말이다. 박탈에서 온 각성은 방향 전환에 가까웠다 — "감사하며 하라"는 이미 가진 걸 다시 보라는 말이다. 전자는 잘 풀릴 때 쉽게 꺾인다. 후자는 반대로 조건이 나쁠수록 힘을 얻는다.
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. 우리는 언제까지 상실이 찾아오길 기다려야 하는가. 각성이 정말 소모품이라면, 소모품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게 다음 과제다. 단식, 디지털 단절, 익숙한 감각 하나를 의도적으로 끊어보는 것 — 상실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결핍을 설계하는 것.
그리고 하나 더. 이 반복 주기, 대략 2년이라는 간격은 우연일까, 아니면 각성이 원래 가진 자연스러운 반감기일까. 답은 아직 없다. 다만 다음에 또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, 그때는 이 질문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다.